일제는 한글 말살을 꾀해 각급 학교와 공식 모임에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조선어 큰사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기 위하여 1942년 10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조선어학회 수난의 발단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우리말로 대화하는 것을 경찰이 트집잡으면서 비롯되었죠. 일제는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교육한 교사 정태진을 체포하였으며, 그가 관여하던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하여 33명의 조선어학회 회원을 체포하고 조선어학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 事件)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일본 제국이 조선어학회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판단해 관련 인사들을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했던 사건이다. '한글학회 사건' 또는 '한글학자 집단 체포사건' 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어학회가 해방 후 이름을 바꾼 한글학회에서는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국어사전 편찬 사업도 중단되었지만, 1945년 해방 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복역하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정인승 등이 풀려나면서 학회를 재건하였고,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중단되었던 국어사전 편찬 사업도 해방 후 재개되어 1957년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 사업이 완료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국어사전을 편찬했다.
이 중 김도연, 김법린, 김양수, 이극로, 이우식, 이윤재, 이인, 이중화, 이희승, 장지영, 장현식, 정열모, 정인승, 정태진, 최현배, 한징 16명은 기소되었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권덕규와 안호상은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체포를 면했다.
기소된 사람은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그와중에 이윤재와 한징이 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하고 장지영과 정열모는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최종적으로 공판을 받은 사람은 12명이다.
공판 결과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과 정태진 각각 징역 2년, 김도연, 김법린, 김양수, 이중화, 이우식, 이인 각각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선고되었다.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과 함께 투옥됐던 한글학자들은 석방되었다. 당시 수감생활이 대단히 혹독했기 때문에 석방될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고 한다. 당시 함흥형무소에서 학자들이 석방되는 모습을 목격한 연세대학교 이근엽 명예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4명이 풀려날 때 3명은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걸어 나왔고 나머지 1명은 아예 들것에 들려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국어사전 출간을 재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건 당시 압수된 후 행방불명이었던 초고 26,500여 장의 원고를 경성역(서울역) 조선운송 창고에서 찾아냈다. 경성고등법원에 항소를 내면서 증거물로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광복 3일 전인 8월 12일에 상고 기각 판결이 나면서 보관된 것.
되찾은 원고를 기초로 내용을 추가하고 수정한 끝에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하였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국어사전을 출판하게 된 이들의 감개가 담긴 서문은 지금 읽어도 뭉클해지는 명문.
우리말 큰사전은 표제어가 16만 4천 125개에 달하고 200자 원고지 2만 5천 900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당시 전국 8도의 순우리말과 한자어, 외래어, 관용어, 전문어, 옛말, 고유명사까지 포괄한 첫 종합사전이다. 또 음소부분의 발음과 문맥에 따른 사용처, 어휘구조까지 명기하여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9] 지금은 한글학회 홈페이지에서 전자책 형태의 스캔본으로 볼 수 있다.
1949년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조선말 큰사전》에서 《우리말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3권까지 나왔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큰사전의 출판은 다시 중단되었다. 전쟁통에 원고를 땅에 파묻고 피난을 가는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발간이 시작되었으며, 유네스코 및 록펠러 재단으로부터의 지원이 막히기도 하는 등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7년 한글날에 6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완간까지 무려 28년이 걸린 인고의 결과물이었다.
이희승은 사건 당시의 수감 생활을 소재로 한 칠불당(七佛堂)이란 제목의 수필을 썼다. 이희승 특유의 유머 감각이 잘 살아 있는 수필로 칠불당이란 필자인 이희승 본인을 포함한 감방 수감자 7명을 부처님에 비유한 것이다. 처참한 수감 생활을 유머 있게 표현함으로서 반어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제에게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해방 이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수여받거나 추서받았다.(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에 부역한 이극로, 이만규, 정열모 제외) 즉 조선어학회 사건도 명실상부 국가 공인 독립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