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해방 직전에 미국과 중경 임시정부가 수행했던 국내침투작전, ‘독수리 작전’에 대한 이야기다. 독수리 작전 혹은 이글 프로젝트는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일본에 대해 벌였던 군사작전이다. 실행 직전에 일본이 항복해 미완으로 끝난 아쉬운 작전이다.
1945년 2월 24일 이글프로젝트
1945년 2월 24일 미국 정보첩보국(OSS) 중국지부는 중경 임시정부 광복군을 투입해 한반도와 일본 본토를 침투하는 이글 프로젝트 실행를 결정했다.(‘독수리작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22 임정편7: 미국 전략첩보국(OSS)문서 목록, 국사편찬위) OSS는 CIA 전신이다. 이보다 4개월 전인 1944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이 미육군 정보국 책임자에게 연합작전을 제의했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5, 조선뉴스프레스, 2015, p535) 한동안 진행이 없던 작전은 1945년 1월 31일 일본 부대를 탈출한 한인 군인 50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중경 정부에 나타나면서 급진전됐다.
1945년 3월 7일 넵코 프로젝트
OSS 본부에서도 유사한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름은 ‘넵코 프로젝트’다. 재미한인들로 부대를 결성해 한반도로 침투해 후방 교란 작전을 수행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는 3월 7일 기안돼 4월 5일 OSS국장 도노번에 의해 최종 승인됐다.
승인에 앞서 OSS 실무진은 이미 재미한인들을 대상으로 인력을 충원하고 있었다. 예컨대 1944년 10월 4일 워싱턴대학 재학생 건우라는 사람은 OSS로부터 ‘한국과 미국을 위해 해외에서 중요한 일을 해달라’는 지원 요청 편지를 받았다. 이렇게 지원 요청에 응한 사람 가운데에는 유한양행을 설립한 독립운동가 유일한도 있었다.(’유일한 이력서’,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24 : 미주편(6) NAPKO PROJECT OF OSS, 국가보훈처) 이들은 사전 제작된 소형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한반도에 침투한 뒤 작전을 벌일 요원들이다. 이들은 로스엔젤레스 연안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훈련을 받았다.
가장 먼저 충원된 사람은 버마전선에서 정보전 활동을 하고 있던 OSS 101부대 소속 장석윤이다. 장석윤은 1944년 7월 넵코작전을 구상중이던 OSS 본부 지시로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장석윤은 포로로 위장해 포로수용소에 잠입해 한인 포로 가운데 조건이 맞는 사람을 선발했다.(횡성문화원, ‘장석윤 미주에서의 독립운동과 삶’, 2022, p156) 선발된 요원 19명 가운데에는 임무를 위해 위장 이혼한 사람도 있었고 성형수술을 한 사람도 있었다. 조국 독립이라는 꿈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정병준, ‘1940년대 재미한인 독립운동의 노선과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요원 후보자 50명 명단은 OSS가 외부인사에 요청해서 받았다. 그 외부인사가 바로 이승만이다. 그리고 장석윤을 1942년 처음 OSS 101부대에 추천한 사람도 이승만이다. 장석윤이 OSS에 등록한 주소지는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회 사무실 주소다.(손세일, 앞 책, p568)
몬태너에 유학중이던 장석윤은 2년 전인 1942년 3월 OSS 전신인 COI가 창설한 101부대에 이승만 추천에 의해 대원이 됐다. 이승만은 자기와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 20명을 후보로 추천했고, 장석윤이 선발됐다. 장석윤은 선발자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이들은 버마전선에서 활동하며 정보, 첩보전을 펼쳤다.(손세일, 앞 책, 2015, pp.263~267) 장석윤은 미국 정부 모르게 이승만과 김구 사이 연락망 역할도 맡았다.(횡성문화원, 앞 책, p306)
진주만 공습과 이승만의 무장투쟁
그 101부대 창설을 줄기차게 요구한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1941년 8월 1일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일본의 군국성을 지적하고 미국에게 선제적 대응을 요구한 책이다. 4개월 뒤 12월 7일 정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승만은 곧바로 중경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장관 조소앙에게 ‘대일본전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다는 선언문을 전보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임시정부가 승인받을 때가 온 것이다. 이승만이 만난 국무부 극동국장 혼벡은 이 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바로 공식 선전포고문을 보내라고 요청했다.(Rober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 Co., 1960, p175) 12월 10일 중경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12월 25일 이승만은 ‘신한민보’ 1면에 ‘공포서’를 기고했다. ‘무장한 일인은 보는대로 포살하며 폭력과 행동으로 왜적들의 전쟁설비를 파괴하고 사나운 맹호들같이 동서 호응하고 남북 약진하여 적을 습격 박멸하고, 개인이나 단체로나 미국과 그 연맹 나라에 실제로 공헌하시오.’(1941년 12월 25일 ‘신한민보’)
진주만 기습 한 달 전인 1941년 11월 이승만은 OSS 전신인 COI(이하 OSS로 통일)의 첩보부대 창설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를 염두에 두고 이같은 공포서를 선언한 것이다.(Clarence Weems, ‘Washington’s First Steps Toward Korean-American Joint Action’,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국제학술대회논문집, 한국독립유공자협회, 1988; 손세일, 앞 책, p179)
OSS과 이승만의 만남
첩보와 신속 대응을 임무로 하는 정보국, OSS가 이승만 주장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대일첩보부대 창설을 기획했던 에센 게일 역할이 컸다. 1942년 1월 16일 에센 게일이 이런 보고서를 썼다.
‘나는 그가 중화민국 아버지 손문이 했던 역할을 한국에 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Gale to Wiley, ‘Korean activities in the US’, 1942년 1월 16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5. 임정10, 국사편찬위) 에센 게일은 조선에서 이승만과 친했던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다. OSS에는 조선에서 활약한 선교사 2세들이 많이 근무했다.
1월 24일 게일은 OSS 국장 도노반에게 중국에 있는 한인을 고용해 첩보부대를 운용하자고 건의했다. 사흘 뒤인 1월 27일 OSS 내부에서 ‘올리비아 계획’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이 입안됐다.
2월 4일 이승만이 그동안 쌓은 인맥을 조직화한 한미협회 미국인 이사장 세 명이 한인을 전쟁에 참가시켜달라고 청원서를 국무부를 비롯한 3개 기관에 보냈다. 2월 23일 라디오 연설 도중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대해서 언급했다. 2월 27일 이승만은 한미협회와 함께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게 임정 승인과 이에 따른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3월 올리비아 계획에 따른 101부대 부대원이 선발됐다. 이 가운데 한인자유대회 개막식 때 독립선언서를 읽은 장석윤이 포함돼 있었다. 101부대는 버마 전선에 투입돼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임정 승인 거부와 OSS의 생존 전략
그 사이 미 국무부 극동국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미국 국무부내 관계자들의 한국관련 정보 공유와 관련한 서신 첨부문서’ 1942년 2월 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0 주미외교위원부2 2.대미교섭문서, 국사편찬위)
‘한국독립 문제의 몇가지 측면들’ 혹은 ‘랭던 보고서’라 불리는 이 문서는 ‘열강이 합의하기 전에는 한국의 어떤 조직도 임시정부로 승인하면 안 된다’고 선언했다.
정보를 다루는 국무부와 OSS는 경쟁관계였다. 이 과정에서 극동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말라는 보고서를 내고, OSS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버렸다.(손세일, 앞 책, p191)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이후 OSS는 설 땅을 잃고 있었다.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에 기여하지 못했던 OSS는 마지막 남은 적국인 일본 패망에 조직의 운명을 걸었다. OSS는 국무부에 의해 폐기됐던 특수부대 운용 정책을 다시 끄집어냈다. 여기에 이승만이 다시 등장했다.
파벌로 망가진 무력 침투
이제 중요한 부분이다. 고질적인 파벌 싸움이 말썽이었다. 1942년 10월 10일 이승만은 OSS 부국장 굿펠로에게 군사력 제공 및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기밀 문서를 보냈다. 구체적인 병력과 운영 방침이 적혀 있었다.(‘이승만의 군사원조제공요청 서신’, 1942년 10월 10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25 임정편10 미국전략첩보국(OSS) 문서, 국사편찬위) OSS는 이를 토대로 이승만과 함께 요원 선발 방식과 후보 선정 과정을 상의했다.
그런데 1942년 12월 24일 OSS 조사분석과 조지 맥큔(Mccune)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이승만이 기밀 정보를 누출해 자기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맥큔 리포트’, 1942년 12월 24일,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30: 미주편(8) OSS재미한인자료, 국가보훈부)
이 중차대한 시기에 또 그 얼토당토 않은 파벌싸움이 끼여든 것이다. 그리고 굿펠로는 편지에 ‘하지만 한길수라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맥큔이 추천하기도 했던 한길수는 임정과 이승만을 비판하고 국무부에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이다. 한길수는 사회주의자 김원봉 계열 단체를 국무부에서 인정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안종철, ‘미국 선교사와 한미관계, 1931-194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10, p192)
이런 파벌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미국무부에 이어 OSS까지도 이승만을 포함한 한국인과 연합해서 사업을 하려는 의도 자체를 포기해버린다.
마지막 시도, 이글과 넵코
1944년 7월 22일 OSS 부국장 굿펠로가 국장 도노반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한국인은 OSS 훈련에 의해 공중이나 수중 침투를 통해 임무를 달성할 수 있다. 몇 달 전 국장이 운전석에 앉은 한국 작전이 이제 움직일 때가 왔다.’(Goodfellow to Donovan, ‘Memorandum from Secretary Joint Chiefs of Staff’, 1944년 7월 22일, 국가보훈부, 앞 책)
1942년 12월 23일 맥큔 보고서. /국가보훈부
조지 맥큔은 한국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조지 맥큔의 아들이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활동한 게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김서연, ‘조지 맥큔의 생애와 한국 연구’, 이화여대 사학과 대학원 석사논문, 2016) 맥큔 보고서에는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한인인 캘리포니아의 김호와 하와이의 던(Dunn)이 이승만에 대해 말해줬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김호는 반이승만파 독립운동가 김원용이 쓴 ‘재미한인50년사’를 함께 저술한 사람이다. 이 책은 1908년 스티븐스 저격사건 전명운-장인환 통역을 이승만이 거부한 이유를 사실과 달리 “이들이 살인자라서”라고 주장한 반이승만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맥큔은 반 이승만파인 김호와 ‘던’을 대표적인 한인 지도자로 거명하고 보고서에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계 인사들과 연계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며칠이 지난 1943년 1월 9일 또 다른 OSS 파견요원 데블린이 맥큔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에는 ‘이 박사는 철저한 조사에 의해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선택됐으며 조사 결과 이 박사는 기밀을 유출한 사실이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만일 기밀이 유출됐다면 그 유출자는 명백함’이라고 첨언했다. 데블린은 이승만이 후보자들에게 보낸 편지와 신문 기사를 첨부했다.(Capt. Francis T. Devlin, ‘KOREANS RECRUITED BY THE UNITED STATES - Mccune report on Korean political repercussions’, 1943년 1월 9일, 국가보훈부, 앞 책)
그런데 7월 21일 미 국무부 차관 베를(Berle)은 극동국장 그루(Grew)에게 ‘OSS가 이승만 그룹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 한국인은 격심한 파쟁 속에 있다’고 의견을 보냈다.(손세일, 앞 책, p519)
당시 OSS를 떠나 국무부에 있던 선교사의 아들 맥큔은 이를 토대로 “OSS가 개별적으로 고용한 한국인 그룹이 작전을 수행하게 한다”는 의견을 베를 차관에게 보냈다. 이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특정 한국인 그룹에게 위임권을 주면 필연적으로 그 그룹으로 하여금 마치 자기네가 미국으로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았고 정치적으로도 독점적인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도록 만든다. 그런 정치적인 행위는 군사작전에 방해가 됨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미 국무부는 소위 ‘임시정부’ 불승인 자세를 견지해왔다.’(’한국문제에 대한 (맥큔이) 베를에게 보낸 서신’ 1944년 7월 31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25 임정편10 미국 전략첩보국(OSS)문서 목록, 국사편찬위)
1942년 반이승만파인 김호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반이승만적인 허위 보고서가 작성되고, 한길수라는 반이승만파가 지속적으로 이승만을 방해하고 결국 그 모든 갈등과 파쟁이 1945년 미국무부는 물론 정보기관인 OSS까지도 한국을 파트너로 부정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임정은 독수리작전에서 동등한 파트너가 아닌 인력을 제공하는 일개 단체로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한인들은 넵코작전에 미국 부대원 자격으로 참가해 훈련을 하다가 불시에 해방을 맞았다.(장세영, ‘태평양전쟁기 미국 전략첩보국의 대한반도 정보전’, 서울대외교학과 대학원 석사논문, 2002) 이게 해방 직전 활활 타올랐던 무장침투작전의 실체다.
맥락과 날짜를 날조한 황현필
이게 황현필씨가 말하는 ‘도노번이 이승만과 접촉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는 사건 실체다. 어디에도 다른 사람과 접촉하되 이승만 만은 접촉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없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미군정 하지 중장 편지에서 테러 예상 배후 인물로 제시한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 가운데 김구를 동그라미로 처리한 것과 똑같은 날조다.
게다가 황씨는 ‘임정이 OSS와 손잡고 대일전을 준비할 때’ 이승만 접촉 금지령을 내렸다고 했다. 이런 걸 날조라고 한다. 임정이 독수리작전에 참가한 시기는 빨라야 1944년 10월이다. 한인 단체를 배제하겠다는 결정은 1944년 7월에 내려졌다. 그것도 이승만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미 국무부와 OSS는 한인 단체 전체를 문제집단으로 규정했다. 시기를 교묘하게 바꾸고 맥락과 단어를 바꿔서 마치 이승만이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황씨는 설명했다.
황씨 주장과 정반대로 이승만은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임정 승인을 요구하며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연합작전을 입안했다. 올리버계획부터 넵코작전까지, 구체적인 단계에서 OSS는 이승만과 이승만의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 작업을 망가뜨린 것은 고질적인 파벌싸움이었고, 이 파쟁이 결국 국가 대 국가 연합작전을 실패하게 만든 원인이 됐다.
황현필씨를 포함해서 이승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에게 과오가 공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아니, 온통 과오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건국 때까지 이승만이 했던 모든 행동들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고 독립운동과 무관하며 오히려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독립운동을 이용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실은 황씨 주장과 많이 다르다. 아니, 반대다. 공적을 강조하기 위해 과오를 덮어버리는 행위는 죄악이다. 마찬가지로 과오를 지적하기 위해 공적을 허위로 뒤집는 진영논리 또한 죄악이다. 황씨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다 있다고 했다. 그 기록이 궁금하다.